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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담배 연기를 목구멍 깊숙이 빨아들인 후 천천히 내뱉었다. 자그맣게 타오르는 담배의 불꽃으로는 그의 얼굴을 조금도 볼 수 없었다. 그는 두텁고 낡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그 뒤에는 짙은 어둠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어쩐지 협잡꾼의 간사함과 원숙한 전사의 노련함이 함께 묻어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스스로를 바드라고 소개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탁했기 때문에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위험한 산 속에 그가 어떻게 홀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다.

 

어쨌든 그는 우리에게 식사와 모닥불의 온기를 자신의 재담과 바꾸기를 제안했고, 우리는 이 기묘한 사내의 제안을 수락했다. 우리는 모닥불 주변의 바위나 나무 그루터기에 느긋하게, 그러나 무기만은 단단히 거머쥐고 기대어 앉아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한동안 끽연을 즐기던 사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사내의 낮은 목소리가 산 속으로 퍼져 나갔다.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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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신이라 불리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들어라. 이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다.

 

 

태고에 모든 것이 뒤섞인 구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 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점차 주위의 비존재를 끌어들여 자신의 크기를 키워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곳에 이 구가 존재하게 되었을 때, 구 내부에서 두 개의 커다란 기운이 천천히 응집하기 시작했다. 이 기운은 점차 자아를 갖게 되었다. 흰색의 빛이 모여 여성의 형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아인하사드라 불렀다. 검은색의 빛이 모여 남성의 형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그랑카인이라 불렀다.

아인하사드와 그랑카인은 힘을 합쳐 자신들의 모체인 구를 깨버렸다. 그러자 구는 산산히 흩어지며 온갖 것이 되었다. 일부는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었고, 일부는 아래로 내려가 땅이 되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물이 생겼다. 땅의 일부는 물 위로 솟구쳐 대륙을 이루었다. 구를 이루고 있던 기운이 온 세상에 흩어져, 온갖 동물과 식물들이 생겨났다.

그 중에서 으뜸가는 생물은 거인들이었다. 그들은 커다랗고 강인한 육체와 지혜롭고 영민한 머리를 갖고 있어 ‘현명한 거인’이라 불리었다. 아인하사드와 그랑카인은 거인들을 모든 생물의 주인으로 임명했다. 이리하여 거인들은 대륙을 지배하며 번영하게 되었다. 

 

신들의 탄생

 

아인하사드와 그랑카인은 서로 결합하여 많은 자식을 낳았다. 그들이 가장 먼저 생산한 것은 다섯 신이었다. 아인하사드와 그랑카인은 땅 위의 권세를 그들에게 주기로 하였다. 장녀 실렌은 물을 다스리게 되었다. 장남 파아그리오는 불을 다스리게 되었다. 차녀 마프르는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차남 사이하는 바람을 다스리게 되었다. 막내딸 에바는 아무 것도 다스릴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시와 음악을 만들어냈다. 다른 네 신들이 자신의 정령들을 다스릴 때, 에바는 그 곁에서 시를 짓고 그것을 음악에 실어 읊었다.

아인하사드는 창조의 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기를 모아 형체를 만들고, 자식들에게 힘을 빌려 그 형체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첫 번째로 만들어진 형체에 실렌이 물의 영혼을 불어 넣었다. 이리하여 엘프가 생겨났다. 두 번째로 만들어진 형체에 파아그리오가 불의 영혼을 불어넣었다. 이리하여 오크가 생겨났다. 세 번째로 만들어진 형체에 마프르가 땅의 영혼을 불어 넣었다. 이리하여 드워프가 생겨났다. 네 번째로 만들어진 형체에 사이하가 바람의 영혼을 불어 넣었다. 이리하여 아르테이아가 생겨났다.

 

그랑카인의 자손

 

그랑카인은 파괴의 신이었다. 하지만, 아인하사드가  하는 작업을 보고 그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자신도 아인하사드를 흉내내어, 자신을 닮은 형체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형체에 불어 넣을 영혼을 구하러 장녀 실렌에게 찾아갔다. 실렌은 크게 놀라며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시여, 왜 그런 일을 하려 하십니까? 창조는 어머니 아인하사드 님의 몫입니다. 부디 당신의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부리지 마소서. 파괴신이 만들어내는 피조물은 재앙을 부를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랑카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실렌을 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여 결국 그녀의 승복을 얻어냈다.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벌써 물의 영혼은 어머니의 몫입니다.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이라곤 이 남아있는 찌꺼기 뿐입니다.’

실렌은 ‘고여서 썩어있는 물의 영혼’을 그랑카인에게 주었다. 그랑카인은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피조물에 하나의 영혼만을 담는 것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장남 파아그리오를 찾아갔다.

‘아버지, 이것은 잘못 된 일입니다. 부디 결심을 거두어 주소서.’

하지만 그도 결국 그랑카인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다 사그라드는 불의 영혼’을 그랑카인에게 주었다. 그랑카인은 즐겁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마프르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 호소했지만, 결국 ‘오염되고 황폐한 땅의 영혼’을 아버지에게 내 주었다. 사이하는 ‘미친 듯이 날뛰는 바람의 영혼’을 내주었다. 그랑카인은 그 모든 것을 들고 기쁘게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내가 만들어내는 생물을 보라! 물과, 불과, 땅과, 바람의 영혼을 갖고 태어나는 그를 보라! 그는 저 거인들보다도 강대하고 현명할 것이다! 이들이 대륙을 지배하리라!’

그랑카인은 자신만만하게 외치며 자신의 형체에 영혼을 불어 넣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그 새로운 피조물은 나약하고, 어리석고, 교활하며, 겁쟁이였다. 모든 신들은 그랑카인과 그의 피조물을 비웃었다. 그랑카인은 부끄러움에,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내팽개치고 도망쳐버렸다. 이 피조물들은 ‘인간’이라 불리었다. 

 

거인들의 천한 종

 

엘프는 현명했다. 그들은 마법을 다룰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거인들보다는 덜 현명했다. 따라서 거인들은 그들을  정치와 마법에 종사하며 자신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했다.

오크는 강인했다. 지칠 줄 모르는 힘과, 강인한 정신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인들보다는 덜 강인했다. 따라서 거인들은 그들을 전쟁과 치안에 종사하며 자신들에게 봉사하도록 했다.

드워프는 재주가 있었다. 그들은 계산에 밝았으며, 섬세한 세공술을 갖고 있었다. 거인들은 그들을 금융업과 공업에 종사하며 자신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했다.

아르테이아는 자유로웠다.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허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날개, 그리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거인들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그들을 잡아 곁에 두려 했지만, 새장 속에 갇힌 아르테이아는 곧 기운을 잃고 죽곤 했다. 결국 거인들이 아르테이아를 풀어주자 아르테이아는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 다니며 종종 거인들의 도시를 찾아와 그들에게 세상 곳곳의 소식을 전해주곤 했다.

인간들은 무엇 하나 능한 것이 없었다. 거인들은 그들을 어디에 써야 할 지 고민하였다. 결국 인간들은 거인들의 노예가 되어, 온갖 잡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다. 인간들의 삶은 가축의 그것에 진배없었다.

죽음의 여신, 실렌


그랑카인은 자유분방한 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장녀 실렌을 유혹하여 그녀에게 아이를 갖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아인하사드는 크게 분노하여 실렌이 갖고 있던 물의 수장 자격을 박탈하고, 그녀를 대륙 밖으로 쫓아내었다. 뱃속의 아이와 함께 하염없이 동쪽으로 도망치던 실렌은, 동쪽의 숲 속에서 혼자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아인하사드와 그랑카인을 저주했다. 그녀가 끔찍한 산고 끝에 낳은 아이들은 실렌이 갖고 있던 절망, 저주, 분노를 고스란히 몸에 갖고 태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신에게 대항하는 세력, 즉 마물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피조물들은 용이라 불리웠다. 그 용들은 모두 여섯 마리로, 아인하사드를 비롯한 여섯 신에 대한 저주를 갖고 태어난 것이었다. 용들은 마물들의 군단 제일 앞에 서서 신들과 싸울 것을 명 받았다. 이에 빛의 용 아우라키리아는 슬픈 눈으로 실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머니,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진정 신들의 영원한 파멸을 원하고 있습니까? 정말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이 피를 흘리며 대지에 드러눕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그의 어떠한 호소도 실렌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마물들은 신들이 살고 있는 궁전으로 쳐들어갔고, 대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여섯 마리의 용들은 신들의 궁전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며 그 놀라운 힘을 과시했다. 수많은 신의 사자들과 마물들이 파괴되어 사라져갔다. 매일 하늘에서는 천둥과 번개가 치고, 지상의 모든 생물들은 두려움에 떨며 천상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전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가 수 주일이나 계속된 후에, 서서히 균형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아인하사드와 그랑카인은 자신들도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지만, 강력한 힘으로 많은 마물들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용맹하던 용들도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점점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마물군단이 전멸로 전쟁은 끝이 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용들은 저마다 날개를 펴고 지상으로 날아 도망쳐갔다. 신들은 그들의 뒤를 쫓아가 모두 죽이려 했지만, 자신들이 입은 피해도 너무 커서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실렌은 자신의 자식들이 전쟁에 패하고 소멸되어가자 그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세계로 들어가 죽음의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랑카인은 실렌을 위하여, 이후 모든 생물은 소멸하는 대신 죽음을 맞이하여, 그녀의 세계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대수해와 에바

 

실렌이 사라진 후, 물을 다스리는 권세는 막내딸 에바에게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에바는 심약한 데다가 언니의 비참한 죽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막중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호수 바닥에 끝이 없는 동굴을 파고 그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물을 다스리는 이가 없어지자, 대륙을 감싸고 있는 물들은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헤매기 시작했다. 어떤 곳은 너무 많은 물이 흘러 늪지대가 되었다. 어떤 곳은 물들이 전혀 모이지 않아 사막이 되었다. 대륙의 일부가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가라앉는가 하면, 하루아침에 없던 섬이 솟아오르기도 했다. 대륙이나 바다나 할 것 없이, 모든 생물들이 이 괴이한 일로 고통을 겪었다. 거인들은 그들을 대표해서 신들에게 항의했다. 아인하사드와 그랑카인은 대륙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에바가 숨어 있는 호수를 발견하였다.

‘네가 책임을 회피하여 생긴 일을 보아라. 너는 우리가 공들여 만든 이 대륙의 균형을 파괴하고 있다. 더 이상 나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아인하사드는 몹시 노하여 눈에서 쉿쉿거리며 불길이 일렁일 정도였다. 그녀는 수많은 거인들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생물들이 실렌의 세계로 들어간 것에 대해 심한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에바는 두려움에 떨며 그녀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에바가 다시 물들을 조정하게 되자, 이전과 같은 끔찍한 재해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변형되어버린 대륙을 다시 원 상태로 돌려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피조물의 기만


이 일련의 실패는, 거인들에게 회의를 품게 하였다. 이미 그랑카인은 인간이란 생물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그랑카인의 음행과 아인하사드의 질투로 세상에는 죽음이 생겨났고, 각종 마물들이 태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에바의 나약함과 무능으로 대륙은 크게 뒤틀리고 말았다. 과연 저러한 신들이, 우리의 경배를 받아 마땅한 존재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한 생각은, 거인들이 점점 강대한 힘을 갖게 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거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전차를 타고, 신들의 처소에 무시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마법을 통해 섬을 통째로 들어올려, 신들처럼 하늘에서 살 수도 있었다. 또한 생명을 연장하여 다시 영원한 삶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러자 거인들은 자신들의 힘이 감히 신들과 견줄만하다고 생각하였고, 자신들의 현명함에도 불구하고 교만해지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신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생명체를 합성하고, 새롭게 창조하려고 했다. 그들은 마침내 신을 물리치고 자신들이 그 자리에 앉고자 했다. 거인들은 신에게 대항할 군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신들의 분노

 

이에 신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특히 자신만의 권한인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에 도전을 받은 아인하사드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온 몸은 그녀가 내뿜는 분노의 불길로 휩싸여서, 곁에 다가가는 것 만으로도 모든 존재를 녹여버릴 정도였다. 그녀는 극심한 분노로, 거인들과 더불어 대륙을, 세상을 멸해 버리겠다고 맹세했다. 그러자 그랑카인이 서둘러 달려와 그녀를 설득했다. 하지만 아인하사드와 동격인 그조차도, 차마 그녀의 불길 곁으로 다가가진 못하고 멀리 떨어져서 얘기 해야만 했다.

‘그대가 창조의 어머니이듯, 파괴는 나의 몫이오. 내가 그대의 몫을 욕심 내어 일어난 결과를, 그 수모를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거인을 벌하는 일은 내가 맡을 테니, 부디 그대는 진노하시오.’

그랑카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대륙의 파괴만은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별 수 없이, 아인하사드는 그랑카인과 협상하여 그랑카인의 무기인 별의 해머를 빌렸다. 그리고 그 해머로 거인들의 도시를 내리쳤다.

하늘에서 새빨갛게 타오르는 거대한 불덩이가 떨어져 내릴 때에야, 거인들은 자신들이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힘을 모아 떨어져 내리는 해머를 막아보려 하였다. 하지만 거인들의 엄청난 힘으로도, 겨우 약간의 방향을 바꿔놓는 게 전부였다. 해머는 거인들의 도시를 스치며 떨어졌다.

그것만으로도 가장 찬란했던 도시가 파괴되는 데는 충분했다. 수많은 거인들과 그 외의 종족들이 순식간에 으스러져버렸다. 대륙에는 커다란 구멍이 파였고, 거대한 해일이 그 위를 휩쓸었다. 거의 모든 거인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거인들의 멸망

 

간신히 목숨을 건진 거인들은, 아인하사드의 분노를 피해 동쪽으로 도망쳤다. 예전 실렌이 도망치던 그 경로와 흡사하였다. 아인하사드는 계속 그들의 뒤를 쫓아가며, 번개로 거인들을 하나하나 태워 죽였다. 거인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랑카인에게 빌었다.

‘그랑카인이시여, 그랑카인이시여! 저희는 충분히 저희의 잘못을 깨달았나이다. 지금 분노의 광기에 사로잡힌 아인하사드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당신 뿐입니다. 부디 당신과 같은 곳에서 태어난 저희를, 대륙에서 가장 현명하고 강인한 생물이던 저희가 멸종하도록 내버려두지 마소서!’

그랑카인은 용서하는 신이었다. 그는 거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남쪽 바다 가장 깊은 곳의 물을 끌어올려 거인들과 아인하사드의 사이를 막았다. 아인하사드는 분노하여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인가! 누가 감히 나를 방해한단 말인가! 에바여, 나의 사랑스러운 딸이여. 내 앞을 가로막은 이 물을 당장 치워버려라. 그렇지않으면, 너 역시 네 언니가 갔던 길을 걷게 되리라!’

에바는 아인하사드를 두려워하여 즉시 물을 모두 바다로 되돌려보냈다. 아인하사드는 다시 거인들을 뒤쫓으며 그들을 하나씩 살해하기 시작했다. 거인들은 다시 그랑카인에게 절규했다.

‘그랑카인이시여! 가장 위대한 신이시여! 여전히 아인하사드는 저희의 마지막 한명까지 없애버리려 뒤쫓아오고 있습니다! 제발 저희를 굽어 살피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그랑카인은 거인들이 서 있는 땅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거인들을 뒤쫓던 아인하사드는 갑자기 거대한 암벽이 눈앞을 가로막자 크게 소리쳤다.

‘마프르, 나의 사랑스런 딸이여! 누가 감히 나의 앞을 가로막는단 말인가! 당장 이 땅을 다시 아래로 내려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네 언니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이 말에 두려워한 마프르가 다시 땅을 가라앉게 하려 했지만, 그랑카인이 얼른 그녀를 막았다.

‘아인하사드여, 이제 그만두는 것이 어떠한가? 당신의 분노는 온 대륙이 알고 있고, 또한 두려움에 떨었다. 저 현명하지만 어리석었던 거인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고 있다. 보라, 한때 세상을 지배하던 저 오만하고 고귀한 종족이 저렇게 비좁은 땅에 숨어서 당신의 눈길을 피하고저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저들은 이제 다시는 대륙으로 내려올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신들에게 도전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저 고원은 영원히 거인들의 감옥이 되어 저들에게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분노를 가라앉히라. 당신의 복수는 완벽했다.’

아인하사드는 아직도 화를 삭일 수가 없었지만, 그랑카인은 자신과 같은 힘을 갖고 있었기에 강제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랑카인의 말대로 거인들을 모두 죽여버리느니, 저 좁고 척박한 고원에서 자신들의 영원한 죄악을 후회하도록 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녀는 거인들에 대한 대추격을 그만두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이후, 지상의 생물들에게 크게 실망한 아인하사드는 더 이상 지상에 대한 간섭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랑카인 역시 공정함을 위해, 더 이상 지상에 모습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이제 신들의 시대는 끝나 가고 있었다.  

 

 

어둠 속 모닥불에서 - 종족 대립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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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말한 사내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가 말을 하는 동안, 우리는 뭔가에 눌린 것처럼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결코 크지는 않았지만 마법의 힘이라도 실려있는 것처럼 우리의 머리 속으로 직접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신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그에게 항의할 수는 없었다. 뭔가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두근거림이 온 몸을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노련한 전사들인 우리가, 겁 많은 아가씨마냥 이런 보잘 것 없는 사내 하나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부엉이가 날개를 퍼드덕 거리며 날아오를 때, 우리는 모두 움찔 하며 몸을 움츠렸다. 사내는 기분 나쁘게 킬킬거리더니 담배 한 대를 더 태우며 얘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말한 신들의 이야기가 그대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려 하지는 말라. 그대들의 신관이, 이 떠돌이 시인보다 더 진실에 근접해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신들의 역사함은 신의 뜻이지, 인간의 뜻이 아니다. 그러니 신관 따위가 어찌 진실을 알고 있겠는가. 그러니 그대들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다시 귀담아 들으라. 이것은 신들이 사라진 이후의 대륙의 이야기. 그대들이 역사라 부르는 이야기이다."

 

역사 – 인간의 시대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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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속에 싹트는 혼돈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하던 거인들이 갑자기 사라지자, 대륙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오직 거인에 의해 통제되어 왔고, 거인을 위해 살아왔던 그들은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날이 오자 광야에 던져진 어린 아이와 같이 두렵고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했다. 하물며, 별의 해머가 대륙을 강타하며 불러 일으킨 대재앙은 사태를 더욱 걷잡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대재앙으로 죽어갔고, 또한 많은 이들이 혼란의 와중에 죽어갔다. 이들은 간절히 신에게 구원을 갈구했지만, 신들은 결코 응답하지 않았다.

처음 상황을 수습하며 나섰던 종족은 엘프였다. 그들은 거인들의 치세기에도 정치를 맡던 종족이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종족들을 하나로 묶어 잘 꾸려나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엘프들은 거인들만큼 대륙을 잘 다스릴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 조금씩 나타나게 되었다. 최초로 엘프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은 오크들이었다.

‘엘프가 우리보다 강한가? 엘프에게 우리를 다스릴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감히 우리보다 약한 자들이 우리 위에 군림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오크들의 군사력은 실로 두려울 정도였다. 전투 속에 살고 자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오크들에게, 평화롭게만 살아오던 엘프들은 대항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대륙의 대부분은 오크의 점령 하에 들어갔고, 엘프들은 대륙 구석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엘프들은 드워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의 막대한 자금과 뛰어난 무기들이 있다면 오크와 맞서 싸워볼 만 하다고 판단했다.

‘땅의 종족이여, 우릴 도우라. 저 흉폭한 오크의 무리가 힘만을 앞세워 우리를 핍박하는구나. 어서 나와서 우리와 함께 저들을 단죄하자.’

하지만 드워프들은 엘프의 도움을 냉정히 거절했다. 그들이 보기에 대세는 이미 오크에게로 기운 상태였다. 항상 실리를 따지는 드워프들이, 약자의 손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엘프들은 분노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엘프들은 이번에는 바람의 종족, 아르테이아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들의 정보력과 공중에서의 공격은 능히 엘프를 도와 오크를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엘프의 사절단은 대륙의 끝까지 가서 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바람의 종족이여, 우릴 도우소서. 저 배우지 못한 오크의 무리들이 힘으로 우릴 핍박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저들에게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러나 아르테이아들은 언제나처럼 대륙의 정세나 전쟁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어느 편도 들지 않기로 마음먹고 더더욱 깊숙한 오지로 숨어 버렸다. 엘프들은 절망했다.

‘아아, 아무도 우릴 돕지 않는구나! 우리는 이대로 끝장나는 것이란 말인가? 저 더러운 오크들이 대륙을 차지하고 모든 영광을 갖게 되는 것이란 말인가?’

 

계산된 계약

 

이 때, 누군가가 나서서 엘프의 앞에 엎드렸다. 모든 엘프의 왕이 살펴보니, 그는 인간의 대표였다. 그는 머리 위에 나뭇가지를 얽어서 흉내낸 왕관을 쓰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비천한 인간들의 우두머리여. 이제 너희들마저 우리를 조롱하려 온 것인가?’

엘프의 왕은 비탄하게 외쳤다. 그러자 인간의 대표는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현명하신 엘프의 왕이시여. 저희는 다만 저희의 미약한 힘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이 말에 엘프들은 크게 기뻐했다. 비록 어리석고 무력한 인간들이라 할 지라도 그들은 워낙 숫자가 많아 전쟁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기특하구나, 인간의 왕이여. 너희가 비록 가벼운 존재이나 우리를 위해 기꺼이 그 못숨을 바치겠다는 충정이 갸륵할 따름이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 너희는 바로 우리들 엘프 밑의 종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에 인간의 대표는 크게 감격한 듯 연거푸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말했다.

‘지극히 존귀하신 엘프의 왕이시여. 엘프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위해 꼭 한가지 청할 것이 있사옵니다. 저희의 힘은 너무나 약합니다. 저희의 이빨은 오크의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고, 저희의 손톱은 그들의 근육에 튕겨 나올 뿐입니다. 그러니 간절히 원컨데, 부디 저희에게 저들과 맞설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소서.’

인간의 이 당돌한 제안에 엘프들은 처음에는 어이없어 하다가 다음에는 크게 화를 냈다. 그들은 당장 손을 내밀어 인간의 대표를 한줌 재로 만들어 버리려 했다. 하지만 엘프의 수장, 베오라는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그들의 주장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우선 인간들이 너무나 힘이 없으면 오크들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다음으로 인간들의 하등한 머리로 마법을 익혀 봤자 크게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결정은 결국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

인간들은 엘프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마법을 익혔다. 그 뿐 아니라, 항상 노동을 하고 자신들끼리 싸우며 단련된 그들의 육체는 오크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강인판 편이었다. 또한 그들은 손재주도 있는 편이어서, 무기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간들은 그 수가 많았다. 인간의 군대는 단기간에 상당한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대륙의 패자

 

인간과 엘프의 연합군은 점차 오크들을 앞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지금까지 오크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무기를 만들어주고 요새를 지어주던 드워프들이 이쪽 편에도 붙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드워프가 만들어준 정교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사용하여 한층 더 강해질 수 있었다. 이제는 엘프의 군대가 없이도 인간들은 오크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엘프들은 전쟁에 승리하면서도 항상 불안해졌다. 날이 갈수록 인간들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엘프들은 끝까지 방심하고 있었다. 설마 가장 비천한, 쓰레기나 마찬가지인 인간들이 반역을 꾀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오크들로부터의 승리가 눈앞에 있는 지금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인간들은 점점 더 고위 마법을 익혀갔고, 마침내 수십 년에 걸친 전쟁은 엘프 – 인간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오크들은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자신들의 근거지인 엘모어 북부로 쫓겨갔다.

‘하지만 엘프들이여, 이것은 그대들의 승리가 아니라 저 더러운 인간들의 승리이다. 그대들은 자신이 키운 저 괴물들을 어떻게 저지할 수 있겠는가.’

헤스투이의 족장이 내뱉었던 독설처럼, 엘프들은 이제 인간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맞서야만 했다. 하지만 이미 엘프들은 오랜 전쟁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반면, 마법이라는 힘을 손에 넣은 인간은 비로소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인간의 엘프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인간들은 오래 전부터 철저히, 비밀리에 이 역모를 꾀해 왔음이 틀림 없었다. 엘프들은 이제야 자신들이 용의 새끼를 키워 왔음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마법과 마법이 부딪히는 격렬한 전투가 다시 한 번 대륙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엘프들은 이미 새롭게 떠오르는 인간의 세력을 막아내기엔 힘이 부족했다. 인간들의 대규모 공세에 엘프들은 점점 밀려나 마침내 자신들의 근거지인 엘프의 숲까지 후퇴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들과의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이 숲은 엘프들의 마법력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었으므로 이 숲을 발판으로 승리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엘프들은 던젼을 뚫고 그 곳에 몸을 숨겨 가면서 인간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무려 석 달 동안 계속 된 끝없는 전투 끝에 마침내 승자가 된 것은 인간들이었다. 엘프들의 자부심도, 엘프의 숲의 마력도, 뛰어난 마법력도 끝없이 몰려오는 인간의 군대를 모두 막아낼 순 없었다. 결국 엘프들은 큰 피해를 입고 숲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그 이상은 인간들도 쫓을 수 없었다. 엘프들은 숲 전체에 강력한 결계를 쳐서 다른 종족의 접근을 막았다.

이로써 인간이 대륙의 패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어둠 속 모닥불에서 - 엘모아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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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는 역사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는 달랐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비슷한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우리 일행 중 가장 아름다운 엘프 아가씨, 아루웬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사내의 말을 듣는 동안 밤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짐승의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바람에 스치는 나뭇가지의 소리도, 계곡을 흐르는 냇물의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들리는 것이라곤 오직 거칠게 내뱉어지는 우리의 숨소리와, 모닥불이 타 들어가는 소리 뿐이었다. 마치 온 산이 숨을 죽이고 이 모닥불 가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가. 가장 비천하던 인간들이 마침내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꽤나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인간들의 의지가 만들어 낸 결과. 신들이라 해도 설마 인간들이 지상의 지배자가 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가장 찬란했던 인간의 왕국에 대해 얘기를 해 주겠다. 오만한 자들은 듣거라. 이것이 거인들의 전철을 밟았던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역사 – 엘모아덴의 붕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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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바뀐 창조주

 

오랜 전쟁 동안 인간 사이에서는 원시적인 형태의 국가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에티나 족을 비롯한 마법을 배운 인간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힘으로 사람들을 보호하고 때로는 겁을 주며 자신들의 왕국을 세워 나갔다. 이 과정에서 여러 번의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혼란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결국 에티나 족의 족장이었던 슈나이만에 의해 현재 아덴과 엘모어 지방이 통일 되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제국의 이름을 엘모아덴 이라 정하고, 자신은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했다. 그의 조부의 머리에 얹혀 있던 나뭇가지 왕관은 결국 찬란히 빛나는 보석으로 장식된 금관이 되어 그의 머리에 얹혀졌다. 그는 후세에 거의 신과 동등한 존재로까지 비춰지게 되었다.

대제국의 황제가 된 슈나이만은 인간들의 태생적인 한계에 대해 고민했다. 죽음과 파멸을 상징하는 그랑카인이 자신들의 창조주라는 사실은 타종족에 대해 언제나 열등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세상의 다른 종족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가 자신들을 이루고 있다는 신화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새로운 제국을 위해서는 그들을 존귀하게 나타내어 줄 새로운 신화가, 새로운 역사가 필요했다.

결국 슈나이만은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통해 그랑카인 대신 아인하사드를 인간들의 신으로 만들었다. 신화와 역사는 왜곡되었고, 흑마법과 그랑카인의 신자들은 박해받았다. 이후 수 대에 걸친 종교 개혁은 마침내 아인하사드를 선의 신, 그랑카인을 악의 신으로 만들었고, 또 인간들은 아인하사드를 자신의 창조주로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접하게 된 그랑카인은 의외로 웃으면서 사실을 받아들였다.

‘저들이 나를 섬기지 않겠다고 해도 나는 화를 내지는 않겠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하늘을 아무리 손바닥으로 덮어 보아도 그 하늘이 너희의 손바닥보다 작단 말인가?’

 

엘모아덴과 페리오스


대륙에서 엘모아덴 제국이 생겨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고 있을 즈음, 바다 건너 그레시아 지역은 아직도 혼란기였다. 이 지역은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 넓게 분포하고 있었고 강력한 권력의 출현도 없었던 바, 통합된 정부의 수립은 요원하기만 했다. 수십 개의 군소 국가들이 난립해 저마다 조금씩 영지를 차지하고 전쟁과 정략을 통해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모아덴의 강력한 군대가 서해대교와 해로를 통해 침범해 오자, 그레시아 일대의 국가들은 연합체를 구성해 이에 맞섰다. 이 와중에 많은 국왕과 귀족들이 죽어 나갔고, 그들이 갖고 있던 권력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자연히 흡수되어 갔다. 결국 엘모아덴의 침략은 오히려 그레시아 일대에 통일 제국이 건설되게 하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 왕국의 이름은 페리오스였다.

이후, 페리오스와 엘모아덴은 서로 경쟁하며 국력을 키워 나갔다. 아무래도 먼저 통일된 제국을 건설하고 또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던 엘모아덴이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제국 사이의 바다가 페리오스의 자주권을 지켜줄 수 있었다. 또한 페리오스에는 거인들이 남긴 뛰어난 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결국 엘모아덴은 압도적이라 할 수 있는 군사적 우위를 갖고도 함부로 페리오스를 복속시킬 수 없었다.

흑마법의 베레스


엘모아덴에는 상아탑이라는 마법 기관이 있었다. 이 기관은 고대의 거인들이 사용하던 마법을 복원하여, 그것을 다시 연구,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집단이었다. 이들이 갖고 있는 마법의 힘은 실로 막강하여 한때는 엘모아덴 제국의 황제와도 견줄만한 영향력을 갖기도 했다.

이 상아탑 출신에서도 가장 강력한 마법을 갖췄던 이가 바로 베레스라는 자이다. 그는 지금껏 인간이 생겨난 이래 최고의 천재였다. 그는 거인들의 마법에 심취하여 그것을 연마하였고, 결국 그들의 힘을 거의 다시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힘은 인간이 가져서는 안될 힘. 저주 받은 힘을 손에 넣은 베레스는 헛된 야망을 품게 된다.

이에 경계심을 느낀 제국과 상아탑은 합심하여 베레스를 처분하기로 한다. 하지만 베레스의 힘은 무척이나 강력했다. 결국 상아탑의 마법사들은 금지된 흑마법을 사용하게 되고, 간신히 베레스의 힘을 약화시켜 그를 지하에 봉인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봉인을 감시하던 기사와 마법사들에도 불구하고 베레스는 봉인을 풀고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헬바운드 섬으로 피신하여 소진된 마법의 힘을 다시 키우며 언젠가는 다시 대륙을 점령하겠다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다.

이 와중에 현재 글루디오 남부 일대가 상아탑 마법사들의 흑마법의 부작용으로 황무지가 되어 버린다. 이 때문에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다. 하지만 제국에서는 이것을 베레스의 소행으로 돌리고, 사람들의 인식에 악마로 각인 시켜버렸다.

다크엘프의 탄생


이 때 엘프의 숲에서는 큰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인간에게 대륙의 패권을 빼앗긴 엘프들은 점점 자신감을 잃고 나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륙에 대한 야심을 모두 잊고 숲 속에서의 평안한 삶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은 것은 갈색 엘프 족이었다. 원래부터 진보적 성향을 띄고 있던 그들은, 금지되어 있는 흑마법을 익혀서라도 인간과 계속 싸워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당연히 다른 엘프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런 때에 한 인간 마법사가 갈색 엘프들에게 접근했다. 그는 대담하게도 갈색 엘프의 족장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갈색 엘프의 왕이시여, 당신들은 힘을 원하고 있군요. 하지만 저 나약한 나무 엘프와 그들의 추종자들은 당신들이 강한 힘을 갖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자신들을 공격할까 봐, 혹은 괜히 인간을 자극하여 더 큰 재앙을 불러 올까 봐 그것만을 걱정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런 나약한 생각이 지금의 엘프들을 만든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인간의 마법사여. 무슨 말로 우리를 현혹하려 드는 것인가?’

‘제 이름은 데스페리온, 일개 마법사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에겐 당신들이 원하는 힘이 있지요. 저는 당신들이 그 힘을 갖도록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대신, 당신들도 제가 원하는 것을 주면 됩니다.’

‘네가 원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냐?’

‘그건 당신들의 젊음, 바로 불노장수의 비법입니다. 제가 아무리 마법에 능통하다 해도 결국 인간. 제 수명은 채 백년도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갈색 엘프의 왕이시여…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데스페리온이 갖고 있는 강력한 흑마법에 매료된 갈색 엘프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결국 흑마법을 익히게 된다. 데스페리온 역시 갈색 엘프들로부터 원하던 정보를 얻고 만족하여 숲을 떠난다. 엘프들은 이 사실을 알고, 아인하사드를 버리고 그랑카인을 좇은 갈색엘프들을 파문한다. 이에 엘프와 갈색 엘프들 간의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이 때 데스페리온의 간계로 갈색 엘프들은 나무 엘프를 전멸시키는 무서운 주문을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나무 엘프들은 죽어 가면서도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들을 배반한 갈색 엘프들에게 저주를 내린다. 그 결과 갈색 엘프들의 숲은 썩어 들어갔고, 갈색 엘프들도 어둠의 종족이 되어 버렸다. 이후 갈색 엘프들은 다크 엘프라고 불리게 되었다.

엘모아덴의 몰락


엘모아덴의 황금기는 엘모아덴의 성립 후 약 천년이 지난 바이움 황제 때였다. 바이움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제국 사상 최강의 군대를 길러냈다. 이 군대는 엘모어 북부에서 꽤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오크들을 아예 현재 오크왕국이라 불리는 검은 숲으로 밀어 넣었다. 또한 페리오스 제국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그레시아 남부 일대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 때가 인간의 왕국이 최대 영토를 가졌던 때이다. 이 전쟁으로 페리오스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이움은 말년에 정복 전쟁에 흥미를 잃고, 영생을 추구하며 제국의 국력을 총동원하여 탑을 쌓기 시작했다.

‘나의 이름은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두려움의 떨림이 실려 울려 퍼지고 있다. 나의 손짓 하나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목숨을 구할 수도 있다. 실로 나의 힘은 광대무변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겨우 수십 년 밖에 가질 수 없다니, 너무도 허무하구나! 아니다. 나는 저 신들에게서 영생을 얻어 나의 제국을 영원히 다스리겠다.’

바이움의 염원을 담은 탑은 무려 30년에 걸쳐 쌓였다. 그는 이 탑으로 신들의 거처에까지 올라가 그들에게 영생의 비법을 얻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들은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비천한 인간의 자식이며, 그 또한 비천한 인간이여. 네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 감히 나의 잠자리를 더럽히러 오는가? 너희는 거인들의 최후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단 말이냐. 좋다, 네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내 너에게 그것을 주겠다. 하지만 너 역시 이 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신의 노여움을 산 바이움은 탑의 꼭대기에 유폐되었고, 공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공사로 인해 엘모아덴의 국력은 급속히 기울었다. 제국의 구심점이던 황제가 갑자기 사라지자, 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황족들간에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다. 이 경쟁에 여러 귀족들까지 합세하여, 결국 엘모아덴 전체가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다. 가뜩이나 대공사로 인해 국력이 소진되어 있던 참에 대규모 내전이 벌어지자 제국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천년 이상 지속돼오던 찬란한 엘모아덴 제국은 불과 20년 내에 붕괴되고 말았다. 

 

 

어둠 속 모닥불에서 -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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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한 끼, 따뜻한 불가와 바꾼 얘기는 점점 불쾌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법사인 호르벤은 얼굴이 시뻘개져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때 같았으면 진작 욕설과 함께 주먹과 칼, 혹은 마법 따위가 나갔을 우리들이었지만, 뭔가에 눌리기라도 한 듯 제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 사내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우리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내는 우리는 안중에도 없는 듯이 행동했다. 그는 주위에 있는 삭정이를 긁어 모아 사그러 들어가는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헐떡이던 불길이 다시금 활기를 찾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내 얘기도 거의 끝나 간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아마 너희들도 잘 알고 있는 얘기일 것이다. 아직도 계속 되고 있는 끝없는 인간들의 아귀다툼. 그리고 거기에 덩달아 춤을 추고 있는 여러 종족들. 이건 엘모아덴이 해체된 후 대륙의 이야기이다.'


 

역사 –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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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모어 왕국


엘모아덴의 붕괴는 페리오스의 해체를 조금 늦춰주는 역할을 했지만, 결국 그레시아 남부를 덮친 전염병과 북부를 덮친 냉해는 페리오스 붕괴에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엘모아덴의 뒤를 이어 페리오스 제국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대륙은 혼란에 싸여 있었다. 마치 대재앙 이후를 생각케 하는 암흑의 시기였다. 귀족들은 저마다 명분을 내걸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고, 때로는 인간 외 타종족에게 영토를 내주기도 했다. 특히 오크들은 군대를 재정비하여 다시금 대륙 진출에 나섰다. 이들의 군대는 여전히 강력했고, 그들은 금새 엘모어 북부를 정복하였다. 하지만 곧 노블 오크와 하급 오크들간의 갈등이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말았다.

엘프들은 다크 엘프와의 끝없는 전쟁으로 이런 상황을 이용할 여유가 없었다. 드워프들은 오크의 군대에 밀려 뜻을 펼쳐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였다.

이 때 다시 등장한 인간들의 국가가 대륙 북부의 엘모어 왕국이었다. 엘모아덴 제국 황제의 직계라는 주장은 어떻든 간에, 엘모어는 확실히 강력한 국가였다.이들은 다시 한번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고자 노리고 있던 오크들을 다시 오크 왕국으로 밀어 넣고, 인간 세상에 뿌리를 박고 살고 있던 드워프들을 솎아내어 스파인 산맥으로 축출하였다. 엘모어는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대륙의 북부 지역을 모두 수중에 넣고, 이제 대륙의 통일을 노리며 남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번 분열되었던 대륙의 통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대륙 남부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오렌은 자국의 강점인 강력한 마법사들과 잘 훈련된 군대를 내세워 엘모어의 거센 공세를 잘 막아내었다. 그리고 그 외의 남국들도 점점 힘을 키워 국가의 형태를 갖춰 가기 시작했다. 오렌을 비롯한 예닐곱 개의 국가들이 균형을 이루며 저마다 국가를 발전시켜 나갔다.

파리스와 라울


수백 년에 걸친 전란 속에서, 먼저 통일의 가닥을 잡은 쪽은 그레시아였다. 베하임 출신의 파리스라는 한 사내가 나타나 오랜 용병 생활을 하며 숱한 전쟁에 참가하여, 전설과도 같은 명성을 얻었다. 그는 베하임의 군대에 스카웃되어 베하임의 영토를 원래의 다섯 배 크기로 넓힌 후, 쿠데타를 일으키고 스스로 왕좌에 올랐다.

먼저 퀘이서의 강력한 하이랜더들과의 격렬한 전투 끝에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던 하이랜더 전사, 토르는 그와 일대일 대결에서 패한 후 진심으로 그에게 감복했다.

‘너는 정말로 인간이란 말이냐? 인간이 이런 강함을 손에 넣을 수 있다니!’

‘내가 그만큼이나 이 대륙을 통일하기를 열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한 북쪽의 전사여, 너의 팔을 내게 빌려다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세계를 보여주겠다.’

파리스는, 이후 흰매 기사단과 바람 기사단, 그리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하이랜더 전사들을 이끌고 그레시아 전역을 누비며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그레시아에서 파리스에 의한 통일 활동이 한창 활발할 즈음, 대륙 남부에서도 통일 제국의 건설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때 아덴에서 나타난 이가 통일왕 라울이었다.

‘열국의 군주들이여, 당신들은 지금 코 끝까지 다가와 있는 이 강대한 적들이 보입니까? 북쪽의 강국 엘모어는 호시탐탐 우리의 재산과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제 저 바다 건너 그레시아 지역마저 통일이 된다면 우리는 사자 아가리에 목을 집어넣고 있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하나로 뭉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특유의 언변과 감화력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대륙 남부를 하나로 묶기 시작했다. 마침 엘모어는 오크들의 대규모 반란으로 아덴에 직접 손을 쓸 수 없는 형편이었다. 라울은 우선 영원한 우방 인나드릴과 병합하여 아덴 왕국을 세운 후 서진하며 기란과 디온을 차례로 손에 넣었다. 그의 전쟁은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남국들의 맹주를 자처해 왔던 오렌은 쉽게 아덴으로의 흡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두 나라는 전면전을 벌이게 되었고, 전쟁은 의외로 아덴의 압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자 사태를 관망하던 글루디오가 스스로 아덴의 제후국을 자처하며 아덴의 통일은 완료되었다.

혼돈의 연대기


아덴의 통일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후, 마침내 그레시아에서도 마지막까지 저항을 하던 훠 일대가 파리스의 손에 떨어졌다. 파리스는 수도를 알펜니노로 옮기고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대륙에서 새롭게 나타난 아덴은, 엘모어의 예봉을 막아냄으로써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입증했다. 하지만 라울의 돌연사로 전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엘모어는 수 차례에 걸쳐 아덴의 북방을 침공했고, 트라비스는 이를 잘 막아냈지만, 열병에 걸려 결국 세상을 뜨게 된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아덴의 왕위에 오른 아마데오는 겨우 16세의 어린 소년이었다.

‘하늘이 우리 그레시아 왕국을 돕는구나! 16살의 꼬맹이가 왕위에 오르다니, 아덴 왕국은 이제 끝장이다!’

파리스는 새로이 아덴의 국왕이 된 애송이 아마데오를 만만히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엘모어의 대규모 침공을 훌륭히 막아내자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아덴이 더 힘을 키우기 전에 한 번 밟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오른팔이던 딜리오스의 만류마저 뿌리치고, 마침내 해로와 육로를 통해 아덴에 대대적인 침공을 가했다.

하지만 결과는 파리스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엘모어의 국왕이던 아스테어가 아버지의 원수이자 오랜 적국인 아덴과 손을 잡은 것이었다.

‘수치도 모르는 개 같으니! 제 아버지의 원수인 새끼 늑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칼을 휘두르느니 차라리 단검을 입에 물고 자결을 하라!’

파리스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아스테어에게 외쳤지만, 아스테어는 느긋하게 이 말을 받아 쳤다.

‘새끼 늑대는 나중에라도 잡으면 되지만, 지금은 늙은 원숭이를 사냥할 때거든.’

결국 기란 일대에서 벌어진 공방전을 기점으로 그레시아군은 자신들의 나라로 퇴각하고 만다. 아덴 침공의 실패는 패배를 모르던 파리스의 자부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결국 홧병이 생긴 파리스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파리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카르네이아는 대제국을 경영하기엔 조금 유약한 인물이었다. 이에 딜리오스의 후광을 입은 크세르스가 모반을 일으키고, 이 전쟁은 결국 그레시아를 두 조각으로 다시 쪼개어 놓게 된다. 비록 두 국가가 여전히 그레시아라는 하나의 틀 안에 묶여 있기는 했지만, 북 그레시아와 남 그레시아는 서로를 견제하며 첨예하게 대치하게 된다.

이것은 아덴을 키워 나가는데 온 힘을 쏟고 있던 아마데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의 주도 하에 아덴과 엘모어, 그레시아는 상호 불가침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불안한 평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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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가 말을 마쳤을 때, 어느 새 하늘 한 구석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길었던 밤이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닥불은 다 사그러들어 매캐한 연기만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사내는 마지막 남아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이 한 모금 빨아 들였다.


‘내 얘기는 여기까지라네. 시간이 지나면 아마 조금 더 길어질 수 있겠지…… 언젠간, 내 얘기에 자네들 이름도 들어가게 될 지 누가 알겠는가?’


조금씩 비쳐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두건 위를 핥고 있었다. 나는 젖먹던 힘을 짜내어 그에게 겨우 한 가지를 물을 수 있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왜 저희에게 그런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사내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내려다 보았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지만, 그의 키는 무척이나 컸다. 수십, 아니 수백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 때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의 처음부터 존재했으며, 인간으로 변장해 이야기를 들려줄 만큼 허물 없고 변덕스러운 자. 그리고 아마도 인간을 만들어낸 자.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다.

 

[출처] 리니지2 홈페이지 파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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